문화일기 54

아내, 초등학생이 되다-가족, 삶과 죽음의 하모니. 잘 떠나보내고 잘 살자.

10년 전 죽은 아내(이시다 유리코)가 초등학생의 몸을 빌려 상실감에 좀비처럼 살아가는 남편과 딸에게 다시 살아갈 의지를 불어넣고 돌아가는 휴먼드라마. 사전 정보 없이 내가 좋아하는 이시다 유리코와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에서 파격 연기를 보였던 모리타 미사토가 출연해서 봤다. 참 곱게 세월을 흘러가는 이시다 유리코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초등생 아내 역할을 한 마이다 노노는 국민배우로 성장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지만 다시 만날 수는 없다.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과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혼'을 매개로 만나는 설정인데 언제 봐도 참 흥미롭다. 가족의 의미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으며, 그렇다고 너무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라고 말한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기댈 곳은 역시 가..

문화일기 2024.12.15

프렌치 수프-요리,사랑,존중의 등식

188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요리사 외제니(쥴리앳 비노쉬)와 미식가이자 요리연구가인 도댕(브누와 마지엘)의 이야기. (스포 있음)도댕에게 외제니는 20년 이상 함께 한, 없어선 안될 사람이자 영혼의 동반자 같은 존재. 연인 같지만외제니가 결혼은 허락하지 않는다. 요리사와 미식가의 관계만으로 충분하다는 외제니의 뜻. '결혼은 디저트부터 시작하는 만찬'이라는 남의 말로 도댕은 애써 넘긴다. ★이대로도 좋지 않아요?★문 잠글 권리가 결혼해도 있을까요?(영화 대사 모두가 삶과 요리 철학을 담은 아포리즘이다. ★는 영화 내내 마음에 닿은 대사들)직접 키운 채소 수확과 분주하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요리를 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마법사 같은 존재다. 식사가 이루어지는 식탁과 요리를..

문화일기 2024.11.16

정숙한 세일즈

내게 올해 최고의 드라마 픽. 5화에서. 판타스틱 란제리 방문판매 주인공들의 대화. "누구 불행이 딱 적당해요?" 여자 1; 바람난 무능력자 남편 둔 가난한 엄마 여자 2; 고상함만 강요받고 산 약사 아내 여자 3; 미혼모 미용사 여자 4; 전과자 남편 둔 아이 넷 엄마 누구나 불행(고통)을 안고 산다. 무게를 어찌 가늠할 수 있으랴.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닌 게 삶이고. 그래서, 웃음과 울음이 섞여 사는 건데 이 드라마가 딱 멋지게 웃프다. 울다가 웃다가 행복하다.

문화일기 2024.10.24

부모에게 던지는 돌직구

오늘 본 허진호 감독의 「보통의 가족」과요즘 눈여겨보고 보고 있는 TV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그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돌직구를 날린다."당신의 자식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보통의 가족」에서 잘 나가는 두 형제의 자식들은 도덕이란 건 쓰레기처럼 내던지고 홧김에 살인을 하고 낄낄거리며 대상의 죽음을 비웃는다. 반성이랑 있을 수 없다.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딸은 십 년 가까이 아빠의 의심 속에 살아왔다. 딸이 아들의 '살인자'일 수 있다는 아빠의 의심. 그런데 물증과 심증까지 확실한 살인이 일어났다.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두 작품 모두 긴장감이 넘치고 쉴 새 없이 관객에게 판단하고 추측하며 따라오게 만든다. 그러면서..

문화일기 2024.10.21

새벽의 모든 - 공존의 방식, 동병상련과 이상향

감독: 미야케 쇼 줄거리 한 달에 한 번, PMS 때문에 짜증을 억제할 수 없게 되는 ‘후지사와’. 한층 악화된 증상에 다니던 회사를 도망치듯 그만둔 그녀는 아동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작은 회사, ‘쿠리타 과학’으로 이직한다. 친절한 동료들과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에 차츰 적응해 가던 중, 직장 내 자발적 아웃사이더 ‘야마조에’의 사소한 행동에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크게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던 어느 날, 발작 증세를 보이며 쓰러진 ‘야마조에’가 극심한 공황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서로의 고충을 나눈 두 사람 사이에는 친구도 연인도 아닌 특별한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 PMS 여자와 공황장애 남자 선입견과 이해의 과정..

문화일기 2024.10.03

한국이 싫어서 - 나도, 그리고 아이들

감독 장건재 계나(고아성)는 한국의 현실(직장, 여자, 가족, 사랑)이 싫어서 호주로 떠난다. 그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주는 플롯들이 이어지는데 보는 내내 공감하며 계속 내 아이들이 생각났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나라인데 경쟁과 차별로 무너지는 현실. 아이들에게 얼마전부터 '너희들 마음만 있다면 외국 나가서 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싫다고 한다. 여행이야 외국으로 다니고 싶지만 우리나라가 좋다고. 영화에 등장하는 나침반 이야기는 내가 힘들 때마다 스스로 위로하는 아포리즘같은 거였다. 계속 이러고 살겠구나 싶다. "정북향을 향한 미세한 떨림,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흔들리며 살아간다. " ★★★

문화일기 2024.09.29

퍼펙트 데이즈 - 그대의 일상에 찬사를

감독; 빔 벤더스 두 번 본 영화. 고독한 히라야마(야쿠쇼 코지). 반복되는 일상을 묵묵히 이어가는 그이가 일상의 사이사이 심어놓은 행복들. 1. 이웃 할머니의 빗자루질 소리에 눈 뜨고 키우는 화분들에 물 주기 2. 일터로 나가며 하늘 쳐다보기 3. 카세트 테잎으로 올드팝 듣기 4. 화장실 쪽지로 불상의 누군가와 빙고게임하기 5. 신사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을 먹으며 필름카메라로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오는 햇볕의 찰나(코모레비) 찍기 6. 차를 타고 가며 거리의 풍경 눈에 담기 7. 퇴근 후 목욕탕 가기와 전철역 지하 단골 주점에서 술 한 잔 하기 8. 헌책방에서 책 사서 읽다 잠들기 9. 빨래방에 빨래 돌리고 단골 가게에서 술 한 잔과 흠모하는 듯한 여주인 만나기 등 그 담백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

문화일기 202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