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필요한 시설과 나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대학교 2학년인 199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학과 글쓰기 소모임에서 좋은 일 하자는 마음이 모여 한국어린이재단이 지원하는 저소득층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자원교사를 했다. 초등학교 야학 비슷한 개념이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한 간석동 산동네 청소년 독서실에서 공부방을 열어서 가르쳤다. 비탈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리가 나타나면 '선생님~~'하고 달려와 맞아주던 것과 쓰레기장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보고 기겁했던 기억은 3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대학 졸업 후 후배들에게 넘기고 자연스레 인연이 끊겼는데, 지역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때인 2001년 산곡동 지역 천주교회 수사님, 지역 단체와 함께 「어깨동무 공부방」을 만들어 자원교사와 운영위원을 했다. 학교 울타리를 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천했다.
그러다 인천 서구로 학교를 옮기면서 2005년 경부터 서구 내일을 여는 교실에서 운영위원에 이어 교장으로 활동을 했다. 그 뒤로 13년 교장을 하다가 2019년에 물러났다. 그런데 올해 사정이 어렵다며 운영위원을 다시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고 제 코가 석자인데도 수락을 해버렸다. 제대로 일하지도 못하면서 부담은 크고 진퇴양난이다.
윤석열 탄핵 전 날, 운영위원 자격으로 코로나 이후 5년 만에 다시 열리는 내일을 여는 교실의 2024 송년잔치에 다녀왔다. 5년 기다린 한을 풀어내려는 듯 아이들의 발표가 활기차고 웃음이 가득했다. 다문화 가정이 절반을 넘는 상황에서도 조화롭게 행사가 치러졌다. 발표가 끝난 후, 내가 어른들 선물 나눔 프로그램 사회를 봤는데, 진행 실력이 녹슬고 몸이 아파 실력 발휘를 잘 못했다. 같이 늙은 시설장님과 운영위원장이 그래도 잘했다며 칭찬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초1 버전의 소감)
어언 34년의 봉사활동이다.
언제 이리 시간이 흘렀는가를 탄식할 겨를도 없이 난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아이들이 잘 자라주어 고맙고, 고생 많은 상주 선생님들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1995년 인천지역 공부방 연합엔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유명한 만석동부두 공부방을 포함해서 16개 공부방(지금의 지역아동센터)이 있었다. 좋은 세상이 와서 가난이 사라지고 이렇게 저소득층만 모아 놓은 시설이 사라지기를 모두가 바랐다. 하지만 지금 인천에 100개가 넘는다.
사회의 빈부격차는 심해졌고 정부는 돈 몇 푼 주는 걸로 이 문제를 땜빵 처분만 하기에 생긴 일이다. 게다가 센터의 서열을 매겨 지원금을 차등지급하는 사례도 있었다. 복지도 경쟁시키는 더러운 자본주의 정책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30년 넘게 버티는 지역아동센터들이 대단하다. 진주의 김장하 선생님 말씀처럼 결국 이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해 가는 것이 맞다.
송년회에 간 김에 내가 썼던 공부방 문집 속 덕담들을 펼쳐봤다. 나, 참 열심히도 살았다.
그리고 문집 뒤 후 후원회원 명단 속 그립고 고마운 선생님들의 이름. 같은 학교 동료교사로 날 만난 죄로 지금까지 소리 없이 후원을 끊지 않고 있는 참 좋은 사람들이다. 어느 학교에 계시건 부디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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