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시인 네루다와 우편배달부가 나눈 '(비유의) 시'이야기인 <일 포스티노>와 어떻게 다를까를 생각하며 선택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영화표에 찍힌 상영시간 2시간 20분이 자칫 길게 느껴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며 보기 시작한 영화 <시>. 그렇게 봤던 영화 <시>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내 생애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배우 윤정희의 군더더기 없고 과정됨없이 자연스러운 연기와 이창동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삶의) 시'가 이토록 애절하고 담담하게 담겨있을 수 없다. 시는 분명히 (억지로 예쁘게) 짓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삶자체를) 쓰는 것이라던 고 이오덕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래서 그 고통의 시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다던......
이창동감독역시 인간의 본성은 어려움, 고통 속에서도 '시'를 읽고 쓰고 싶어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화두를 풀어가는 주인공은 여자다. 여성의 고통은 그렇게 이 땅 삶 곳곳에 스며있지 않은가.
외할머니 양미자(미자는 배우 윤정의 본명이란다)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하는 마음과 함께 외손자가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에 갈등한다. 그 갈등 속에서 선택한 것은 시의 참뜻을 체득한 미자의 모습, 그것은 미자의 시에 나와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남긴 시 '아네스의 시'는 가해자인 손자에 대한 용서이면서 미자 스스로의 지난 삶 속에 얽혀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가슴 절절한 미자의 고백일 것이다.
영화속 시강좌 프로그램 중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서 미자는 언니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던 순간을 꼽았다. '미자야, 미자야, 이리 와'하는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을 쏟는 장면.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진실하게 불려진다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영화 일포스티노에서 시는 비유라 했던 네루다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영화 <시>. 인간의 모든 삶이 시가 될 수 있음에도 우리는 현실의 팍팍한 경계벽에 부딪혀 아예 감성의 샘을 스스로 닫아 버리고 살고 있다. 영화 <시>는 그 막힌 샘을 틔워 흐르게 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 양미자가 선택한 그 강물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있는 듯 느껴진다.
나도...(삶의 )시를 쓸 수 있을까.. 아이들이 삶의 시를 쓸 수 있도록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치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 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 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양미자 (이창동)-
: 아네스는 등장인물 박희진의 세례명...아네스는 순결, 순수의 상징.
★<박하사탕>, <오아이스>,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새로운 삶의 영화를 보여준 배우 윤정희 씨가 칸에서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으리라는 예감으로 이 글을 마친다.
'문화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me, too>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0) | 2010.06.04 |
---|---|
내가 살던 용산 (0) | 2010.05.27 |
멋진 삶을 살다간 화가 - 점선뎐 (0) | 2010.04.22 |
[리틀DJ] - 소통은 그 자체가 감동이 된다. (0) | 2010.03.17 |
좋은 이별(김형경) - 상실의 시대에 던지는 깊은 위로 (0) | 2009.12.04 |